산은 참 많은 걸 품는다. 오지랖이 넓다. 그래서 거기에는 온갖 것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신들도 산다. 인류의 역사가 산에 기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산악국가다. 우리네 문화의 원형질이 많은 부분 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산 중 계룡산은 그 위상이 독특하다. 능선 모양이 닭 벼슬을 닮은 데다 반룡이 웅크린 형국이라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만 정신사적 의미는 자못 심장하다. 벼슬과 용이 함께한다는 것은 ‘이룸’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고로 수많은 재사들이 큰 뜻을 품고 계룡산을 찾는 까닭이다. 조선시대 국가 차원에서 이곳에 산신을 모시는 중악단(中岳壇)을 설치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영검한 산이다.
중복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 31일 미명(未明) 계룡산 수정봉(해발 662m) 코밑자락. 간밤에 뿌린 소나기 흔적으로 골안개조차 후텁지근한데 수십 길 절벽에 붙어 있는 너럭바위 위에서 희끗희끗한 움직임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한 조각 구름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모시 한복 차림에 흰 수염의 초로(初老)가 지어내는 몸짓이다.
손과 발을 한껏 쥐어 튼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도 홀연 몸을 낮게 깐 듯하면 어느새 훌쩍 튀어 오르고, 얼굴을 보이는가 싶으면 금세 뒤통수를 나타낸다.
쉼 없이 동작이 이어지지만 격렬함보다 물 흐르듯 부드러워 춤사위를 보는 것 같다. 반시간이나 흘렀을까? 언뜻언뜻 터지는 구름 사이로 해가 두어 뼘 떠오르자 그제야 움직임을 멈춘다. 그렇게 몸을 썼건만 숨이 가쁜 기색조차 없다. 편안한 얼굴이다. 도사가 따로 없다.
전통무예 기천문(氣天門)의 박사규(61) 문주(門主)가 하루를 여는 모습이다. 기천문은 산중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내려오다 1970년 초대 문주인 박대양(58) 진인(眞人)이 하산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우리 고유의 수련법. 몸의 수련을 통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한다. 한마디로 ‘몸으로 닦는 도(道)’다. 현재 국내에만 30여 개 도장이 있고, 미국(워싱턴·LA)과 캐나다·일본 등 해외에도 진출해 있다. 그동안 10여 개 대학의 동아리와 직장동호인 모임의 활동까지 감안하면 기천공부를 하는 사람은 족히 수십만 명이 된다.
박 문주는 이들을 총괄하는 대표이자 공식적인 최고 사부(師父)다.
“기천문이 굳이 문주라는 직함을 쓰는 건 중국의 소림파, 무당파, 화산파처럼 독립된 무예체계를 갖춘 무문(武門)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박 문주가 계룡산에 둥지를 튼 것은 12년 전. 계룡산의 정기를 받으려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기천을 알리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바람에서였다. 처음 갑사 쪽에 있다가 신원사 쪽을 거쳐 5년 전 지금의 장소(충남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1구 안골)에 있던 허름한 농가를 개조해 황토 집을 짓고 ‘기천문 계룡본산’을 열었다. 세 명의 제자와 함께 기거하면서 매주 일요일이면 전국에서 찾아오는 50여 명의 제자를 연천봉 자락 수련장에서 직접 지도한다.
고수급 관장들은 물론 학생, 대학 교수, 경찰, 군인, 무당, 스님 등 다양한 직업에 11살부터 70대까지 연령층도 천차만별이다. 시범을 보여 가며 웃는 얼굴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도하지만 형형한 눈빛에서 뿜어나오는 카리스마에 죄다 압도당한다. 아무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못한다. 조금만 삐딱해도 사정없이 죽비로 내리이친다. 영락없이 ‘할아버지 탈을 쓴 호랑이’다.
1977년에 입문
기천문에는 수련정도(功力)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 단계별로 행인(行人)-공인(功人)-정인(正人)-법인(法人)-도인(道人)-진인(眞人)-상인(上人) 순이다. 각자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행인에서 공인이 되려면 3년 정도 수련해야 되고, 공인에서 정인이 되려면 또 4년, 정인에서 법인이 되려면 추가 3년 정도의 수련이 필요하다. 진인은 평생 수련해야 될까 말까 하고, 상인은 타고나야 된다. 현재 진인은 초대 문주 한 명뿐이고 상인은 박 진인의 사부였던 원혜(元慧)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문주는 자신의 ‘품계’에 대해 한사코 노코멘트다.
하지만 제자들에 따르면 도인 수준을 넘은 지 오래됐지만 사부인 박 진인을 모시는 입장이라 겸양을 지키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의 공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내공만 강조하고 무예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친구와 팔뚝 부딪치기로 공력 겨루기를 한 적이 있는데 상대가 세 번 만에 전치 일주일의 내상을 입고 주저앉아 버렸을 정도다. 또 남대문에서 사업할 때 무술을 한 깡패 출신 경비 7명과 주차 시비로 싸움이 붙어 ‘대풍역수(大風逆手)’ 둘둘말이(연타석 공격)로 일거에 제압, 지금도 상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박 문주가 기천에 입문한 것은 1977년. 벌써 34년째다. 당시 합기도 5단이었던 그가 친구한테서 서울 약수동에 고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박 진인한테 도전했다가 참패를 당한 게 계기였다.
“당시 제 나이가 스물 아홉으로 합기도를 한 지 10년이 넘어 한창 기량이 무르익은 데다 그해 장충체육관에서 전국무술사범시범단(30명)에 낄 정도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은 터라 무서울 게 없었죠. 사실 그 전에도 18기니 태권도니 각종 무술 고수들과 숱하게 겨뤄봤지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고향친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뭐 장력(掌力)으로 촛불을 한2010.920개 날리고, 눈 내린 위를 걸어도 보통 사람보다 발자국이 많이 안 나고, 기(氣)로 치료를 하고……, 하여튼 중국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붙어보기 전엔 믿을 수가 없어 도장을 찾아갔죠.
간판이 ‘기천연무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158㎝에 50㎏나 될까 싶은 게 중학교 2학년 정도로 보이더라고요. 한꺼번에 다섯 명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붙어보니 한 수도 못 받고 두 수 만에 다운되고 말았어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돌제비가 독수리를 공격하는 연비파문(燕飛波紋)이란 수였습니다. 처음 보는 수였으니 당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길로 사부로 모셨죠. 그분이 바로 박 진인이십니다.”
박 문주가 기천인이 된 것은 어쩌면 ‘팔자’였는지 모른다. 기천을 공부하려면 처절하리만큼 혹독한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데 무술에 대한 소질도 있을 뿐 아니라 강한 집념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이 전남 진도인 박 문주는 어려서부터 ‘깡다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한학자이면서 논농사만 50마지기를 짓는 아버지가 예순셋에 얻은 아들이라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덩치가 왜소(현재 165㎝)해 업신여김을 당하는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지기 싫은 성격에 초교 4학년 때부터 동네 형들한테 당수(그때는 태권도를 그렇게 불렀다)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진도농고 시절엔 복싱을 했고요. 그 바람에 공부는 중간 정도밖에 못했죠. 합기도는 고교 졸업 후 시작했습니다.”
1973년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결혼, 3년간 농사를 짓다 상경해 이대 입구에 있는 의상실에 취직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재단과 디자인 보조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배웠다. 지금은 분업이 돼 있지만 당시엔 두 가지를 다 해야 했다.
그렇게 5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를 시작했다. 도매사업과 병행해 이태원에 ‘미가로(美街路)’라는 브랜드로 여성패션점도 운영했다. 이미 가정도 꾸린 터라 열심히 했다. 장사가 잘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대문에 추가로 도매매장을 내고 ‘미가로’도 두 군데 지점을 냈다. 86아시안게임에 즈음에는 이태원 매장에 국내287최초로 330㎡(100평)짜리 패션쇼룸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태원에서만 하루에 1500만~20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도·소매를 합쳐 전체 매출이 하루 5000만원 가량 됐다. 당시로는 엄청난 일로 지금도 패션업계에서는 그의 ‘성공신화’를 기억하고 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할 때 우리나라에 기성복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어요. 그러니까 시장에서도 옷을 잘 못 만들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기술력과 경험을 갖춘 데다 당시로서는 하이패션을 지향한 덕분에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농사를 지을 때도, 상경을 한 뒤에도 한시도 운동을 놓지 않았다. 그 덕에 공력이 절륜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스승은 그가 근기가 있으면서도 문중을 배반하지 않으리라 직감하고 일대일 특별지도를 했다. 수련은 주로 남산, 장충단공원, 삼청공원 그리고 정릉 숲 같은 야외에서 했는데 처음 3년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아야’ 했다.
정공법과 동공법
“기천문에서 하는 무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정지된 상태로 하는 정공법(靜功法)과 움직이면서 하는 동공법(動功法)이 그것이죠. 정공법은 동공을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靜)이라는 것은 정공에도 있고 동공에도 있어요. 동(動)도 마찬가지고요.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이죠. 그러니까 동공이라도 하나의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리는 삼매의 경지에 이르는 거죠. 그러니까 몇십 번,몇백 번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동작을 천 번이고, 이천 번이고 하는 거예요.
그분이 작정하고 저에게 이런 수련을 시켰으니 어땠겠어요? 발에 돌을 매달고 산길을 달리고, 모래 자루를 짊어진 채 온종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공을 섰습니다. 삼복 더위 때 겨울옷을 입힌 채 포플러나무 300그루를 팔뚝으로 치고 달리기를 두세 번씩 시키기 일쑤였고, 내가신장(內家神掌: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항아리를 안은 형상을 하고 발을 안쪽으로 45도 비틀어 기마자세를 취하는 정공법의 한 가지)을 할 때엔 아예 사부님이 등에 올라가서 30분이고 1시간이고 앉아 있곤 했습니다. 일반인은 빈 몸으로도 5분 하기 어려운 동작을 말입니다. 한마디로 반 죽이는 겁니다.”
스승은 늘 제자를 극한으로 몰아세웠다. 엄살이나 꾀를 부리면 사정없이 몽둥이찜질을 해댔다. 안 맞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내야 했다. 처음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어느 새 저절로 이뤄졌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를 안 맞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통으로 고통을 이겨내도록 하는 스승의 조련법이었다. 온몸이 멍투성이라 공중목욕탕에도 못 갔지만 그러는 사이에 수법(手法)이며 보법(步法), 신법(身法)이 절로 몸에 붙었다.
“사부가 어느 날 제 키 높이의 축대를 선 자리에서 뛰어오르래요. 안 될 것 같아 주춤했더니 ‘당신은 할 수 있다’며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치는데 저도 모르게 붕 날아올랐습니다. 그 뒤론 모둠발로 뛰어 사람 키 정도는 다 밟고 그랬지요. 또 15~20m의 거리에서 화살을 쏘면 서서 손으로 화살을 잡아야 된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된대요. 저도 수련을 통해 해보니하까 정말 됩디다.
거기까지 가게 되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죠. 사부가 앞에서 죽도나 몽둥이로 계속 쳐주고 그걸 막아내는 훈련을 하다 보면 감각이 익혀집니다. 사정없이 들어오는 매를 맞지 않으려면 딴 도리가 없지요. 화살, 그거 잡아집니다. 제가 체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지만 인간에게 한계란 없어요. 인간의 능력은 정말 무한합니다. 다만 훈련하기 나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