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상인과 1대 문주 박대양
박 문주의 이야기와 ‘기천’이란 책을 참고해 기천이 이어져 온 도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 박사규 문주의 사부는 박대양(朴大洋 : 1952∼현재) 진인이다. 박대양은 기천문의 1대 문주이다. 박대양이 기천에 입문해 현재까지 살아온 과정은 한편의 대하소설이다.
박대양은 강원도 양양 사람이다. 다섯 살이 되던 해 겨울, 양양의 설악산 계곡에서 얼음을 치고 놀다가 얼음이 깨져 계곡에 빠졌다고 한다. 이때 지나가던 노인이 그를 살려줬고 이 일을 계기로 노인과 어린 박대양은 인연을 맺게 됐다.
노인은 설악산 밑에 있는 암자인 보광암에 기거하고 있었다. 어린 박대양은 보광암에 자주 놀러갔다. 할아버지가 사탕도 주고 무동도 태워주면서 예뻐했기 때문이다.
보광암에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스님이 노인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어린 박대양은 “스님도 할아버지인데 왜 저 할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느냐?”고 물었다. 스님 왈 “내가 어렸을 때도 저분은 할아버지였고 지금도 할아버지다”라고 답변했다. 이 노인이 바로 기천문의 지킴이였던 원혜상인(元慧上人)이다. 상인은 기천의 최고수를 일컫는 호칭이다.
1957년 원혜상인은 박대양의 어머니에게 승낙을 받고 아이를 설악산으로 데려갔다. 원혜상인은 박대양을 등에 업은 다음 눈을 감게 했다. 그는 경공술을 써서 거의 날아갔다고 한다. 바람소리가 휙휙 들리고 산이 휙휙 지나갔다.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르는 깊은 산속이었다. 후일 설악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날부터 혹독한 산중 수련이 시작됐다.
처음 3년간은 내가신장(內家神掌)만 했다. 선 채로 양쪽 무릎을 오무려 맞대고 두 손은 눈 높이에서 교차한 자세로 서 있는 자세다. 이렇게 서 있으면 단전으로 모든 기운이 모인다. 대단히 힘든 자세로 보통 사람은 5분 이상 버티기 힘들다. 필자도 해봤지만 바들바들 떨려서 도저히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박대양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오직 이 자세만 취하는 훈련을 받았다.
식사는 거의 생식이었다. 어떤 때는 산짐승의 고기로 만든 육포조각을 먹기도 했다. 가끔 원혜상인이 마을에서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왔는데, 마치 한 손으로 접시를 들 듯 가볍게 들고 단숨에 산을 올라왔다. 평상시 거처는 자연동굴이었다. 동굴 앞에는 대나무 발이 쳐있었다. 그런데 원혜상인은 동굴을 드나들 때 동굴 입구의 발을 건드리지 않았다. 너무 빨라서 발을 들어올리는 것을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발의 틈새 사이로 연기처럼 빠져나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솔장법’으로 치면 벼락에 맞은 듯 재가 됐고 쌀 한 가마니 정도는 공깃돌 들 듯 가볍게 다뤘다. 또한 ‘돌단장’으로 집채만한 바위를 축구공 차듯 발로 차버릴 수 있었다. 또한 축지법을 구사했으며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고 올라가는 경공법도 구사했다. 저녁 무렵 설악산을 출발해 경북 봉화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설악산에 돌아오는 일이 예사였다. 물론 걸어서 다녔다.
‘진법’을 펼치기도 했다. 박대양이 수련도중에 하도 힘이 들어서 도망치려고 몇 번 시도했다. 하루종일 도망쳐도 처음 수련하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진법’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원혜상인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평범했고 키도 170cm를 넘지 않았지만 힘은 장사였다.
박대양은 5세 때 입산하여 19세 때까지 설악산에서 기천을 연마했다. 엄청난 고행의 과정이었다. 스승이 시키니까 무조건 한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속가에 있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 박대양은 어머니를 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원혜상인은 “네가 3년만 더 공부한 후 어머니를 만나면 어떻겠냐”고 제자를 달랬지만, 박대양은 산을 내려가겠다고 계속 떼를 썼다. 1970년 박대양은 나머지 3년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하산했다. 당시 원혜상인의 나이는 159세였다고 한다. 그가 하산한 지 3년 후 원혜상인은 세상을 떠났다.
모래사장에 발자국 남기지 않아 산속에서 기천만 공부한 박대양은 사바세계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다.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 계룡산에 있던 박대양은 간첩으로 체포된다. 호적이 없어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 영락없이 간첩으로 몰릴 판이었는데, 산을 내려올 때 문득 스승님이 당부하던 말씀이 생각났다.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탄허(呑虛) 스님을 찾아라. 그러면 도와줄 것이다.”
간신히 연락이 닿은 탄허 스님이 신원보증을 해줘 경찰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강원도 설악산과 오대산 일대의 불교계 고승들은 원혜상인의 도력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허 스님이 원혜상인을 만날 때는 삼배를 올렸다.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이런저런 도담을 나누는 사이였던 것 같다.
무술은 절정의 고수였지만 사회 경험이 전혀 없었던 박대양은 속세에 내려와 좌충우돌한다. 1970년대 중반 부산에서의 일이다. 당시 부산에는 칠성파라 불리는 조폭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박대양을 한번 손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맞짱을 뜨기로 했다. 박대양이 해운대 백사장에 가보니 칠성파 멤버 14∼15명이 각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대양은 바람처럼 빠르게 그들을 때려 눕혔다. 어찌나 빠른지 주먹과 발이 어디서 나오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싸움이 끝나갈 무렵 박대양은 모래사장을 빠져나갔는데,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칠성파가 놀란 것은 열댓 명이 한 사람에게 패했다는 것보다 그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훗날 부산지역에 ‘늑대소년’이 나타났다는 괴담이 떠돌기도 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떤 비법일까. 일종의 비보법(飛步法)이다. 칠성보(七星步)를 보여준 것으로, 후일 박대양은 7명의 제자를 일렬로 세우고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갔지만 제자들은 낙엽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이것이 칠성보인데 해운대 백사장에서 칠성파는 그 칠성보에 놀란 셈이다.
박 문주의 방에는 조그마한 단군 영정이 놓여있는 앉은뱅이책상과 고목나무 밑둥을 다듬어 만든 차상이 하나 있었다. 문파의 문주가 기거하는 처소라기엔 너무도 소박하다.
박대양은 19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내로라하는 무술 고수들과 무수한 실전대결을 펼쳤는데, 밀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속세가 싫어져 다시 산에 들어가 7년 동안 스님생활을 하기도 했다.
1대 문주 박대양은 1996년 제자인 박사규에게 문주의 자리를 넘겼다. 박대양은 지금은 결혼해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다. 박사규가 스승인 박대양을 만나게 된 사연도 매우 흥미롭다. 박사규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진도는 예향인 호남에서도 알아주는 예향의 본거지다. ‘진도에서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 ‘진도 남자 중에서 북 장단과 판소리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
진도에서 성장한 박사규는 예인적인 기질이 있으면서도 무술을 좋아했다. 10대 후반부터 합기도를 시작해 합기도 공인 5단에 이르렀다. 1970년대 후반 장충체육관에 전국 합기도 고단자 30인이 초청되어 시범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박사규도 30인 안에 들었을 정도로 고단자였다. 그러다가 무술의 고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바로 박대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당시 고단자가 있으면 찾아가서 한판 붙는 것이 유행이었다.
세 살 어린 박대양 스승으로 모셔
박대양이 있는 서울 약수동에 찾아갔다. 1977년 박사규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합기도 고단자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한판 붙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박대양의 한 수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었다. 박대양이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렸지만 무릎을 꿇고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다. 3년 동안 박대양을 직접 모시면서 혹독한 수련을 감당했다. 박대양 사부는 기벽(奇癖)이 있어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했는데, 박사규는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드디어 1997년 그의 나이 49세 때 세속생활을 정리하고 계룡산에 들어왔다. 문주라는 법통을 이어받은 지 1년만이었다.
요즘 박 문주는 전통 춤사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기천의 동작 하나하나가 전통 춤동작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통 춤 동작이 3박자인데, 기천의 동작들도 3박자다. 3박자로 이뤄진 국악의 리듬에 맞춰 기천의 동작을 펼치면 그 자체가 바로 춤이 된다.
박 문주는 진도 출신의 ‘씻김굿 무형문화재’인 박병천(72)씨의 무가(巫歌) 녹음테이프를 수시로 듣는다. 박병천은 진도에서 8대째 내려오는 세습무(世襲巫)로 진도 씻김굿과 진도북춤을 이어받은 명인. 그는 박병천의 가락을 들으면 흡사 기천의 동작들을 위한 장단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가장 천대받았던 무속인들이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민족의 리듬과 가락을 보존해 왔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趙龍憲
●1961년 전남 순천 출생
●원광대 대학원 불교민속학 전공, 철학박사
●한·중·일 삼국의 600여개 사찰과 암자를 현장 답사
●원광대 초빙교수
●저서 : ‘나는 산으로 간다’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고심 끝에 박 문주는 ‘무예와 춤은 동전의 양면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도(武道)는 예도(藝道)로 통하고 예도는 무도로 통한다. 따라서 무도와 예도는 한 마음에서 갈라져 나온 오누이인 것이다. 그 한 마음은 기천의 심법(心法)이자 단군의 심법이며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심법이자 결국 우리 민족의 얼이다. 기천의 2대 문주 박사규는 힘주어 말한다.
“기천은 우리민족의 얼입니다. 얼이 없어지면 민족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글: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발행일: 2004 년 02 월 01 일 (통권 533 호)
쪽수: 536 ~ 547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