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렇게 7년을 보냈다. 웬만한 수는 다 익혔다. 그렇다고 ‘하산’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사부와 일상생활을 함께하며 매일같이 다지기를 했다.
“제가 매장에 있으면 그분이 매장으로 오세요. 그리고 제가 생산라인 공장에 갈 때나 시장에 원단 가지러 갈 때도 함께 가서 원단도 같이 짊어지고 다니면서 교감을 나누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가 더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주로 새벽에 수련을 했습니다. 새벽 4시 반에 제가 차를 몰고 신당동 댁으로 가서 사부님을 모시고 삼청공원이나 남산에서 2~3시간 수련을 하곤 했습니다.”
기천에는 수많은 법이 있다. 우선 인사법인 단배공(壇拜功)에 이어 내가신장·육합단공(六合丹功) 등 기법(氣法=정법)을 통해 축기(畜氣)를 배우고 나면, 태극 모양을 응용한 반장(攀掌) 흐름을 중심으로 신법(身法=동법)으로 나아가게 된다. 신법에는 보법을 바탕으로 각종 권법과 검법 그리고 기천무(氣天舞)가 있다. 보법에는 전진보·외보·금계보·또르륵보·삼성보·팔선보 등이 있고 권법에는 반장·하반장·수낙어각·풍낙어수·육합추·용틀임·낚시걸이·마법역권·등타·집기내력권·돌개법·등천법·연비파문·양권·월야차·칠보절권(七寶切拳) 등이 있다. 특히 칠보절권은 대풍역수·일보삼권·일보이권·일보일권·풍수·비연수·금화장으로 이뤄져 하나의 절권만으로도 응용하면 일개 문파를 이룰 정도의 뛰어난 수들이다. 이 밖에도 장백각저·천룡·천여·천라·어룡장·암연투응 등 고급 수들이 있다. 기천의 특징이자 장점은 각 법을 익히면 검법이나 봉술에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천수련은 단순하다. 한 가지 수를 체화(體化)할 때까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일법(一法)이 안 되면 만법(萬法)이 무용지물이다. 또한 일 법 일 법이 고통이다. 극한의 고통이라야 심신을 변화시킨다. 수만 번 손바닥으로 진흙이나 나무를 쳐대면 돌도 부술 수 있고(破石掌), 팔뚝이나 발로 훈련하면 야구방망이 서너 개는 단번에 박살낼 수 있다. 지금까지 정인이 50여 명밖에 안 되고 법인은 고작 12명뿐이라는 사실은 기천수련이 그만큼 어렵다는 증거다.
하지만 박 문주는 파석장은 물론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내는 합장공(合掌功)뿐만 아니라 신법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기천무까지 구사한다. 모든 법의 응용 변화가 자재로울 때 가능한 경지다. 심법수련도 경지에 올라 50대 초 날카롭던 인상을 벗어 버린 지 오래다. 마음을 분리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 수 있는 환영신공(幻影神功)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기천은 수행의 도
그렇다면 그에게 이 같은 비법을 전수해준 박 진인은 어떤 인물일까?
“사부님은 양양 사람으로 다섯 살 때 조사부이신 원혜 상인께서 데려다 무예를 가르치시는 바람에 열아홉까지 산생활을 한 분입니다. 조사부는 쌀가마를 공깃돌 다루듯이 하고 ‘솔장법’으로 아름드리 나무를 재로 만들 정도로 공력이 높았답니다. 또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가볍게 오르내리는가 하면 저녁에 설악산을 출발해 경북 봉화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다음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답니다. 그런 분한테 조련을 받았으니 어련하겠습니까?”
박 문주에 따르면 박 진인은 무예는 비길 데 없는 고수였지만 하산 뒤 세상 물정을 몰라 온갖 풍파를 겪었다.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 계룡산 진장암에 있다가 간첩으로 몰려 원혜 상인과 교류가 깊었던 탄허(呑虛) 스님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는가 하면 1970년대 중반 부산 해운대에서 ‘칠성파’ 조직원 7명과 맞장을 떠 ‘신화’를 남기는 등 좌충우돌했다. 야구방망이 등으로 무장한 조폭들을 순식간에 서너 명 잠재우고 달아났는데 비호같이 빠른 것은 둘째 치고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늑대소년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대학생 7명을 일렬로 세워 놓고는 낙엽 스치듯 머리를 밟고 지나가는 시범을 보여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체수에 이해할 수 없는 무예를 세상이 알아줄 리 없었다. 그래서 박 진인은 기천을 세상에 확인시켜주기 위해 수없이 겨뤘다. 하지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 ‘스트리트 파이팅’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지자 1976년 서울 약수동에 ‘기천연무장’이란 간판을 내걸고 정식으로 도장을 차렸다.
기천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다른 무술의 고수도 많았다. 현재 잘나가고 있는 무술단체의 대표들도 포함돼 있었다. 박 문주가 진인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진인은 기벽(奇癖)이 심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우리 사부님은 남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광인(狂人)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분이에요. 기인(奇人) 소리를 듣던 중광 스님을 열 명 붙여놔도 안 돼요. 때때로 한 번씩 탈바가지를 쓰고 우리 매장에 나타나서는 한복에다 머리핀을 스무 개쯤 붙이는가 하면 명동 같은 데 가서도 맨발로 덩실덩실 춤추고 그래요. 옆에 따라 다니는 제가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분은 태연히 그러고 다녔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본심을 알려면 한 번 흔들어봐야 한다며가까운 사람들 사무실을 한 번씩 찾아가서 깽판을 치곤 했습니다. 장난감 총이나 물총을 들고 다니면서 느닷없이 직장에 찾아가서 쏴 버려요. 이태원 매장에서도 그런 행위를 많이 하셨어요.
이웃집에 보석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는 진주 목걸이 같은 걸 그냥 깨물어 버려요. 그러면 제가 해결해야죠. 전생의 인연이라고 여기는 저도 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부 곁을 떠나 버렸어요. 제가 처음 여기에 입주할 때도 한바탕하셨죠. 사부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시면서 어디서 탔는지 검은 안경을 끼고 차 등에 올라탄 채 춤을 추며 마을로 들어오시더라고요.
마을 사람들과 기천문 식구 150여 명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부님은 어린애 같은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그분이랑 지내려면 동심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견뎌내지 그렇지 않으면 못 견뎌요.”
하지만 박 문주는 끝까지 사부를 챙겼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란 믿음에서다. 어찌 생각해보면 멋지지 않나. 세상에 사부님 말고 또 그럴 자가 있을까. 이심전심(以心傳心). 명색이 진인인데 제자의 충심을 모를 리 없었다. 드디어 사제 인연을 맺은 지 20년 만인 1996년 10한월 3일 개천절에 사부는 문주의 법통을 제자에게 물려줬다.
박 문주는 대권과 함께 대업을 물려받았다. 대업이란 기천의 틀을 견고히 세우는 동시에 단순한 무술이 아닌 세상을 구원하는 ‘활명의 법’으로 거듭나게 하라는 주문이다. 그가 문주 자리를 물려받은 지 1년 만에 세속 생활을 정리하고 타던 승용차와 단돈 10만원만 들고 계룡산으로 입산한 것도 바로 대업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기천이 수행의 도입니다. 따라서 무예는 수행의 방편이지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불가와는 달리 마음을 바루기 전에 몸의 수행을 강조할 뿐이죠. 그런데 아직도 마음만 바루려고 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러니 깨우치는 사람이 잘 안 나오는 겁니다. 마음의 집이 몸인데 이게 부실해 버리면 비가 새고 바람에 흔들릴 텐데 그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육신을 쓰고 있는 한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악은 틈만 나면 창 끝을 들이밉니다. 늘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어떤 수행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기천은 기법과 신법 그리고 심법(心法)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완성된다는 얘기다.
박 문주는 요즘 종종 전통무예 대표들과 모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는 늘 전통무예의 앞날과 나아갈 길이 화두다. 박 문주는 제대로 된 몸에서 제대로 된 정신이 나오고, 제대로 된 정신이어야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온다고 강조한다.
“전통무예도 이제는 치고받고 하는 ‘술(術)’ 차원에서 벗어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국민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데 무예만 한 것이 없습니다. 조사부께서는 일찍이 ‘머지않아 인류가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싹쓸이될 텐데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미리 자가면역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며 ‘기천이야말로 바로 면역력을 길러주는 구원의 큰 법이니 반드시 널리 알려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선구자의 혜안이죠.”
몸의 면역력 키워줘
박 문주는 내가신장만 제대로 해도 심신을 바룰 수 있다고 역설한다.
“기천의 모든 수행과정이 집약돼 있는 기천의 핵입니다. 발목부터 머리까지 몸의 중요 관절을 모두 꺾어서 역근(易筋)한 상태로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인체 내에서 기가 모든 경락으로 잘 유통되게 해주며, 특히 단전호흡이 저절로 이뤄지게 해줍니다. 그럼으로써 단전호흡을 통해 축적된 기가 신체의 각 부위에 자연적으로 공급되죠. 내가신장만 제대로 수련해도 거의 모든 질병을 자연치유할 수 있어요.
특히 내가신장을 서다 보면 고통을 통해 정신의 정화를 맛볼 수 있으며 심신의 능력이 극도로 강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신장에 이어 범도→대도→소도→금계독립→허공(伏虎) 순으로 진행되는 걸 합쳐 육합단공(六合丹功)이라고 하는데 기맥을 열어주고 단전으로 축기가 되도록 해줍니다. 따라서 육합단공을 하면 기혈순환이 원활해져 몸에 있는 면역력이 극대화됩니다. 실제 간질환 등으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정상을 되찾은 사례가 수없이 많아요. 아마 우리가 종교집단이었으면 난리가 났을 겁니다.”
박 문주는 사부인 박 진인의 ‘똥의 도’ 얘기를 즐겨 한다. 먹기는 엄청 먹는데 싸지 않아 모든 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각종 성인병 등 개인의 질병은 물론 사회나 국가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데도 기막히게 유용한 논리다. 있는 자가 (부를) 먹기만 하고 싸지(내놓지) 않다 보니 사회가 병들고 국가가 앓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현실을 꿰뚫는 사자후(獅子吼)다.
무예의 역사는 오래다. 기본적으로 수렵채취시대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보다 강한 상대들의 몸짓을 흉내 내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무예는 하나의 원형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한뿌리인데 전수과정에서 나름대로 특정동작을 강조하다 보니 별도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일 뿐이다. 기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박 문주는 국선도나 태껸 등도 원형은 같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기천이 가장 원형에 가깝다고 봅니다. 기천이 산중에서 비전(秘傳)된 사실이 방증입니다. 많은 손을 거치지 않았다는 얘기죠. 기천의 역사는 산중에서 수련하다 임진왜란 같은 국가 위기 때 산에서 내려와 싸우고 끝나면 다시 산으로 돌아가고 하는 ‘지킴이’의 역사입니다.”
사실 기천에 대한 역사적 문헌 증거는 없다. 행하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行而無跡)는 선가의 불문율에 따른 때문이다. 자고로 도라는 것은 특성상 스스로 찾아가 노력해서 깨우치는 것이지 말이나 글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기천은 도다. 그래서 기천의 가르침 중 으뜸은 ‘말과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천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단군조선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믿는다.
부여의 대천(代天), 고구려 경천(敬天) 혹은 다물, 백제 교천, 신라 숭천(崇天), 발해 진종(眞倧) 등을 거쳐 내려오다 고려의 불교, 조선에선 유교에 치여 산중으로 숨어들어 ‘지킴이’들에 의해 명맥만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판소리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듯이 기천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을 터. 박 문주의 바람처럼 세상에 나온 지 40년 된 기천이 과연 한민족의 웅비를 도모하는 ‘구원의 큰 법’이 될지 기대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