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시절부터 전수된 기천문
그는 동이 틀 때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고 해가 떨어지면 활동을 중지한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침에는 계룡산 봉우리를 순례한다. 우선 관음봉에 올랐다가 문필봉으로 간다. 천제단이 있는 문필봉에서 수련을 한 후 연천봉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한바퀴 도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6시에 시작하면 9시가 약간 넘어 숙소로 돌아온다. 낮 시간에는 혼자 경전을 읽거나 방문객을 맞이한다. 지리산, 모악산, 설악산, 속리산 등에서 공부한 산사람들이 기천문 문주가 계룡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데, 그들과 도담(道談)을 나누며 기운을 교차하기도 한다.
기를 공부한 사람들은 기운을 교차하면서 상대방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간파한다. 외공을 닦지 않고 내공만 닦은 사람은 아무래도 기운이 약하다. 주말에는 각지에서 올라오는 기천문 수련생들을 지도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수박도’의 자세.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한다.
세간에서 ‘산중무예’로 알려진 기천문(氣天門)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전통 무술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해 여러 대학에 기천문이라는 동아리가 결성되기도 했다. ‘보보비운(步步飛雲) 일권타마(一拳打魔)’라는 문구는 대학가 기천문 동아리의 슬로건이다. ‘걸음걸음은 나는 구름이요, 한 주먹으로 마를 타파한다’는 문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통쾌함과 그 어떤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기천의 기원은 5000년 전 단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고구려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이어 현재에 이어졌다는 것. 우리나라 상고사의 전통과 궤를 같이하는 만큼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문파다. 상고사의 중요한 경전으로 여기는 ‘천부경’과 ‘한단고기’는 기천의 이론적 배경이다.
기천은 겉으로 보면 무술이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한민족에게 면면히 내려온 마음 닦는 법이기도 하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말이 있듯 안으로는 심성을 닦고 밖으로는 몸을 닦는다. 먼저 몸을 강철같이 단련하고 그 과정에서 몸의 모든 기맥이 뚫리면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비우면 부수적으로 몸은 저절로 닦아진다고 본다. 하지만 기천은 몸이 먼저고 마음이 그 다음이다. 꽉 막힌 사무실에서 만성운동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기천의 몸 닦는 노하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천의 유래가 단군까지 소급된다고 하셨는데, 그걸 입증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문헌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파에서 사용하는 기본예법 중 ‘단배공(檀拜功)’이라는 인사법이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단군배공(檀君拜功)’으로 단군에게 올리는 인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단군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 때문에 ‘단군배공’을 ‘단배공’으로 줄여서 불렀던 것이죠. 기천에서 스승께 인사드릴 때 취하는 인사법이 바로 단배공입니다. 기천을 지켜온 역대 지킴이들로부터 쭉 내려온 인사법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천은 단군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마침 문하생 2명이 박 문주에게 장중하면서도 복잡한 절차를 따라 하직 인사를 했다. 양손과 양발 끝에 기를 모아서 태산이 엎드린다는 심정으로 하는 인사로 4∼5분이 걸렸다. 인사하는 문하생의 무릎과 발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자체가 엄청난 수련으로 보였다. 저절로 단전에 에너지가 모아질 것 같았다. 박 문주는 이것이 바로 단배공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부터 무예의 전통 단절
-단군 이래로 기천이 전해져왔다는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납니다. 벽화에 수렵도가 있어요. 말을 타고 활을 겨누면서 사냥하는 모습이죠. 그 반대편에 보통 ‘수박도’라고 부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남자가 웃통을 벗고 두 손을 들어 상대방과 겨루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자세가 기천에서 연습하는 자세 중 하나입니다. 이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기천에서는 이 자세를 ‘범도자세(虎勢)’라고 불러요. 범이 웅크리고 있는 자세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이 자세를 많이 연습합니다. 그런데 그 자세가 벽화에 나와 있는 겁니다. 기천을 모르는 사람은 벽화를 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천을 아는 사람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리죠.
이걸로 보아 기천은 고구려 시대에도 행해졌던 겁니다. 한쪽에는 수렵도, 다른 한쪽에는 범도자세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고구려 남자들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구려 시대를 대표하는 놀이가 ‘수렵’과 ‘기천’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수렵이 일종의 군사훈련이었다면 기천은 개인 차원의 무술연마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기천 동작 하나하나는 바로 전쟁터에 투입될 수 있어요. 칼을 잡으면 곧바로 검법이 됩니다. 고구려 남자들이 평소 이러한 연마를 했기에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강국 고구려를 지탱했던 이면에는 기천이 있었다는 거죠. 기천을 맨손으로 하면 권법(拳法)이요, 봉(棒)을 들고 하면 봉술이 되고, 검을 들면 검법(劍法)이요, 활을 들면 궁술(弓術)이 되고, 창(槍)을 들면 창법(槍法)이 됩니다.
기천문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의선인(早衣仙人)에 관한 것입니다. 고구려 선맥(仙脈)에 조의선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조의(早衣)는 검은 옷을 뜻합니다. 즉 검은 옷을 입은 선인이라는 뜻이죠.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은 국난을 당하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켰습니다. 당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조의선인 3만명이 이들과 맞써 싸워 이겼습니다. 그런데 기천의 역대 스승들도 검은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천에서는 이들 조의선인을 기천을 수행했던 사람들로 추정합니다.
또 하나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연개소문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집을 나와 전국 각지의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기천을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천의 수련단계 중 ‘상박권(上膊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호랑이가 공격을 하기 위해 엎드려 있다가 솟구치는 자세입니다. 솟구치면서 상대의 윗부분, 즉 관자놀이나 턱을 강타할 수 있는데 그 파괴력이 엄청납니다. 상박권은 기천에서도 고급과정에 속하는 자세로 배우기 힘들기로 유명합니다. 연개소문은 상박권을 연마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연개소문은 하산한 후 중국의 무술 고수들과 겨뤘지만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나라 태종의 팔대장군(八大將軍)을 기천의 무학(武學)으로 제압했을 뿐 아니라 중국 무림을 평정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은 정치인이기에 앞서 중국 무림세계에도 널리 알려진 무술의 고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더라도 기천은 고구려 시대에도 존재했던 무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를 볼까요. 고려 공민왕릉 석상의 옷매무새를 보면 양쪽 허리춤 부분에 매듭이 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기천의 입장에서 이 매듭을 주목합니다. 기천에서도 양쪽 허리춤에 매듭을 합니다. 저를 가르친 박대양 사부님도 양쪽 허리춤에 매듭을 짓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대양 사부님이 어렸을 적 설악산에서 공부할 때에도 조사부(祖師父)인 원혜상인이 반드시 양쪽 허리춤에다 매듭을 짓도록 지도했다고 합니다. 이 매듭은 기천 옷매무새의 관습입니다. 저는 그 전통을 공민왕릉 석상 매무새에서 발견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도 기천으로 상징되는 상무정신이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시대입니다. 암흑시대죠.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예의 전통이 거의 끊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만 특수한 능력이 있어도 탄압을 했습니다. 문(文)을 숭상하면서 무인을 천대하고 억압했죠. 그래서 전통 무술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이처럼 실날같이 이어져 오던 맥이 20세기 후반에 들어 수면 위로 나온 것입니다. 기천이 이렇게 세상에 등장한 것은 실로 수백년 만의 일입니다. 저로서는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박 문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천은 고구려의 상무적 전통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로 이어진 정신의 정수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까.
고구려 정신의 핵심은 민족의 주체성이다. 그것이 많이 남아 있는 도맥이 바로 선가(仙家)다. 필자는 유·불·선 삼교 가운데 민족의 주체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선가는 고구려와 많이 겹친다. 기천은 고구려와 선가의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단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